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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WIND69 2011. 4. 12. 09:32

한 아이에 아버지가 되고 마흔이 넘어서야 이제 아버지란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는 듯 하다. 얼마 전 신부님 아버님께서 소천하시고 발인 미사가 있던 날,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놀이터 뒤어 숨어 먼 하늘을 바라보며 한참을 그렇게 또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입술을 꽉 깨물어도 주책없이 계속 눈물이 흘럿다. 왜 그랬을까?

술과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어머니와 이혼하고, 자식을 앞 세워 제 세상으로 보내고, 지질이도 궁상맞게 살았던 사람... 그 덕분에 어머니와 나는 참으로 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것도 아니고, 자식에 대한 사랑이 남달리 적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힘껏 자식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 했던 듯 하다. 따지고 보면 그 가슴 속은 어떠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난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냥 무덤덤 했을 뿐이었다. 처와 아들 녀석도 데리고 가지 않고 그저 나 홀로 그리고 노원나눔의집 식구들과 부산까지 내려갔다. 아버지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고 눈도 차마 감지 못한 채 운명을 달리하셨다. 주마등처럼 옛날 고생했던 시절, 술 취한 아버지 덕에 죄인호송차에서 함께 실려 경찰서 유치장으로 이송되었던 기억, 동생과 아버지가 일하던 마찌꼬바 공장 다락방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두려움에 떨던 기억, 어머니와 싸우면 말리던 기억, 동생과 함께 아버지를 도망쳐 나와 보문동 삼거리 앞에서 흠뻑 비를 맞고 떨던 기억, 어쩌다 아들이 보고 싶다며 연락해서는 다방에 불러 계란을 띄운 짙은 쌍화차를 먹어야 했던, 그리고 다방 여자들이 신기한 듯, 가엾은 듯 날 바라보는 그 눈길들... 그 기억하기조차 싫었던 그래서 묻어두고 싶었던 기억들이 스쳐갔다.

혹시나 좋았던 기억들이 있었을까? 아무리 기억을 되살리려 애를 써보았지만, 아버지와의 기억은 그 흔한 놀이동산 한 번 함께한 기억조차 없었다. 그런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난 그리 애써 담담해 하지 않아도 담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화장장으로 들어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도 내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난 활활 타는 아버지를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뒤편 나무 뒤에 숨어 목을 놓아 울었다. 가슴 가득 찬 원망과 차마 용서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그리 떠나버린 아버지가 미워 목을 놓아 울었다. 그리고 그 이후론 다시 울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사람의 죽음이란 다 같은 것이지만, 다른 것도 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빈소에는 그 흔한 근조화 하나 없었다. 그것이 다 아버지와 무엇 하나 변변히 이루어 놓은 것 없었던 내 탓이었겠지만 그 쓸쓸한 죽음이 참으로 가슴 아팠다.

그때 함께 아버님의 죽음을 지켜주셨던 김홍일신부님은 용서와 화해를 이야기 하셨다. 용서와 화해... 조금만 더 일찍 내 그것을 깨달았었다면 아버지의 죽음이 그토록 쓸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슴 아파할 일도, 목놓아 울 눈물도 조금은 덜 했을지도 모르겠다. 한참 시간이 흘러 가끔 아버지를 기억할 때도 조금은 홀가분 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도 아버지를 용서했는지 그리고 진정한 화해를 구했는지 난 잘 모르겠다. 그냥 시간이 흘러버렸고 아버지의 기일조차도 아련하다. 꿈 속에서 조차 난 내 아버지를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하였다. 그저 삶에 허덕이며 지난 과거를 핑계 삼아 난 내 아버지의 기억을 하루하루 지우며 살아가기 급급했다. 그런데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그런데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질 수 있었다니...

오늘 난 오래전 아버지와 함께 찍었던 졸업사진을 꺼내 본다. 변변하게 아버지와 함께 찍어놓은 사진이라곤 이모와 사촌형님과 동생들, 그리고 어머니와 찍은 사진 밖에 남아있지 않다. 지금보니 그나마도 아버지와 나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던 듯하다. 참으로 각박하게도 살아왔다. 난 제대로 아버지와 화해한 것일까? 난 제대로 아버지를 용서한 것일까? 난 제대로 한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난 또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하늘은 파랗고 뿜어내는 담배의 매쾌한 연기가 흩날린다. 바람이 분다. 뼈 속까지 시린 바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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