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이모... 이쁜 우리 이모... 본문
깊어가는 봄만큼 세상도 푸르게 푸르게 변해갑니다. 몇 일을 비가 오더니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저 넘어 산등성이는 뿌연 물안개를 품었습니다. 시골 산자락에 밥 짓는 연기처럼 따뜻한 풍경을 선사합니다.
이모... 제겐 이 이모라는 말이 특별합니다. 어려서 아버지와 헤어지고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난 제게 이모들은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나 봅니다. 그래서인지 이모들은 저를 마치 친아들처럼 대해주셨습니다. 덕분에 저는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이모들에게서 듬뿍 받으면서 성장할 수 있었지요. 비록 가난하기는 했지만 마음은 누구보다도 부자였습니다. 지금도 그 시절을 추억하면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지는 것은 아마도 이모님들의 사랑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오늘 저는 그런 둘째이모를 모시고 벽제추모장을 다녀왔습니다. 벽제로 가는 내내 옛 추억을 떠오르려 했지만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습니다. 무표정하지만 곱디 고운 이모의 영정사진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우리 이모 참 예쁘다... 우리 이모 참 예쁘다...’라는 말을 곱씹으며 눈물을 참아내었습니다. 둘째이모는 음식도 참 잘하시고, 손도 무척 크셨습니다. 늘 명절이 되면 마땅히 친적집이라곤 오갈 데 없는 저를 불러 손수 지으신 평양식 만두를 한 소쿠리를 담아주시며 ‘우리 동만이, 우리 동만이’ 웃으시던 그 모습이 이제는 제 기억으로만 남겨두어야 하는 추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는 윗층, 아래층에 살던 시절이라 이모가 제 반 엄마였지요. 어느 날인가 멀리 사우디로 일하러 가신 이모부가 모처럼 귀국하시던 날, 손에 발발이 들려진 선물꾸러미를 보고 저는 사촌형님, 동생들이 참 부러웠었습니다. 그때 당시 워크맨이라는 것을 저는 처음 보았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것이 저에게는 무척이나 탐나는 물건이었습니다.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저 부러워하고만 하고 있는 내게 이모는 그 선물을 저에게 덥썩 안겨주셨습니다.
이모는 생활력 강하시고 남자처럼 호탕하셨습니다. 하지만 참 고집도 세셨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이모고집은 황소고집보다도 더 세었던 듯 합니다. 덕분에 착하디 착하시기만 하신 우리 이모부가 참 고생도 많이 하셨습니다. 이모가 좀 덜 고집스러우셨다면... 조금은 더 세상과의 인연을 이어가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그 억척스러움과 그 고집이 사남매를 키워내시는 힘이었을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 장성한 저를 보시며 ‘우리 동만이 잘 컷다’며 등을 두들겨 주시던 그 모습도 이제는 추억으로 남겨두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가슴 아픈 후회를 남기고야 말았습니다. 나중에 제가 크면 우리 이모들 소꼬리 사서 곰탕을 끓여 들인다며 입버릇처럼 이야기 했지만 전 그 작은 약속하나 지키질 못했습니다. 삶이 어렵고 퍽퍽해서가 아니라 일상에 찌들어 잊고 살았던 것이라 더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제 추운겨울, 집주변 골목길에 눈을 치우고 돌아오면 맛나게 끓여 큰 대접에 한 사발씩 담아내시던 그 라면 맛을 더 이상은 볼 수 없겠지요? 나물이며, 만두며 맛난 명절음식을 듬뿍듬뿍 담아주시던 우리 이모표 음식도 이제는 더 이상은 맛볼 수 없겠지요? '우리 동만이, 우리 동만이' 하시며 등 두들겨주며 웃어주시던 그 예쁜 이모를 이제 더 이상은 만나뵐 수 없겠지요?
오늘 따라 우리 이쁜 이모가 해주시는 밥 한그릇이 정말 정말 먹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