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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척도 안되는 몸으로 4해(四海)를 초월하려는 뜻이 있네-공제윤두서 본문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당산에 달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
가사문학의 대가인 고산 윤선도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것이다. 특히나 그의 오우가는 우리네 국어책의 한면을 장식할 정도로 유명하다. 또한 다산 정약용을 모르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하지만 공재 윤두서(1668~1715)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고산 윤선도가 그의 증조부가 되고 다산 정약용은 그의 외증손이 되나 그들의 유명세에 비하면 윤두서는 그리 알려진 이는 아니다. 그러나 혹여 그가 그린 자화상을 보게 된다면 ‘아! 이그림 …’ 하며 반가와할 사람은 더러 있을 것이다. 숙종연간에 활약한 대표적인 선비화가요 남인의 골수이며 뒤에 우리가 실학이라고 불리우는 학문적, 사상적 경향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던 윤두서. 시,서,화에 두루 능했던 공재는 서가(書家)로서도 유명했으며 그림에 대한 식견도 폭 넓었다.
조선중기에서 후기로 넘어서는 전환기 속에서 구태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회화관과 화법에 입각한 새로운 그림의 경향을 제시한 사실주의 회화의 선구. 오늘날 공재 윤두서를 따라다니는 꼬리표에는 한결같이 그를 조선후기 사실주의 회화의 선구로서, 특히 훗날 단원 김홍도에 의해 더욱 발전한 속화(俗話:풍속화를 지칭함)라는 그림의 새로운 분야를 처음 개척한 화가라는 수식어가 늘 함께한다.
인조의 아들이었던 효종이 죽음으로 복상문제로 효종의 어머니인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아들 효종의 복을 1년상을 입어야 하느냐 2년상을 입어야하는 예(禮)론이 분분하였는데 서인이 효종이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1년상을 주장하자 그에맞서 남인이었던 윤선도는 3년상을 주장하다 패하여 목숨까지 잃을뻔 하였으나 선왕의 사부였다는 이유로 죽음을 면하고 유배를 떠나게되니 이로인한 정치적 좌절은 윤두서로 하여금 학문과 그림에 몰두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는지도 모른다.
윤두서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후기의 실학사상의 뿌리를 이루는 내용들이다. 그의 폭 넓은 학문적 관심은 다방면에 걸쳐있었는데 그것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이후에 실학이라고 불리우는 현실성의 획득과 정확히 알고 유용하게 쓰고자하는 시대적 욕구의 산물이었고 그것은 그의 그림에 있어 사실주의정신과 실학정신의 실현으로 나타났다.
윤두서는 초상화를 비롯하여 지도, 성현도, 말그림, 속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하였다. 그의 사실주의 정신은 특히 인물화나 동물그림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흔히 그림을 하는 사람들은 그의 명작으로 주저없이 <자화상>과 <노승도>를 꼽곤한다. 그리고 미술사가들은 예외없이 이 두작품이 우리나라 회화사상 불후의 명작임을 인정한다. 사실 그의 자화상은 두 눈초리가 삼엄하여 보는이를 압도한다. 그리고 그의 눈빛에는 정치적 좌절과 25에 진사가 된이후 내리 10여년간 계속되었던 양부모와 친부모 친구의 죽음등으로 48세의 생을 쓸쓸히 마감한 공제의 비애, 분노같은 것이 그대로 녹아 있는 듯 살아오는 느낌전하기에 충분하다.
‘육척도 안되는 몸으로 4해(四海)를 초월하려는 뜻이 있네. 긴 수염나부끼 고 얼굴은 기름지고 붉으니 바라보는 자와 사냥꾼이나 검걕이 아닌가 의 심 하지만, 저 진실로 자신을 양보하는 기품은 대개 또한 돈독한 군자로서 부끄러움이 없구나’ - 이하곤(윤두서의 그림친구로 <자화상>에 붙힌시)
그러나 그의 선구자적인 노력에 대한 칭송과 함께 비판의 소리도 있으니 그것은 용기있고 대담한 자기결단과 변화에 까지 이르지 못하고 다만 새롭게 다가올 시대의 변혁과 그 가능성의 제시수준에 머물러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사실 그의 이상이 제대로 구현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혹자는 윤두서의 삶과 예술을 이야기 하면서 변혁의 계절을 살다간 지식인의 고뇌를 생각케 한다고 했다. 그래서 공제의 예술을 논할때면 그의 선구적 업적과 한계를 함께 말하게 되는데, 학자에 따라서는 그를 후기의 선두가 아니라 중기의 막내로 다루기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공제를 후기의 선두로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유홍준의 이야기처럼 공제의 한계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한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대와 그로인한 관념적 그림이 난무하던 시대에 사실주의 정신을 추구했던 공제의 외로움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새로운시대를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은또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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