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민화이야기 본문
혹시 당신에게 행운이 있다면 저자거리 한귀퉁이나 동네골목 어귀에서 벙거지를 눌러쓰고 앉아 무언가 열심히 손놀림을 하는 환쟁이를 만날수 있을지도 모른다. 풀어진 괴나리 봇짐 속에는 오색찬연한 물감들과 화얀화선지가 펼쳐져 있고 그 위에 혁필이라고 불리우는 가죽붓에 골고루 오색 물감을 입혀 그림을 그린다. 손이 한번 갈때마다 글씨가 되고 글이 곧 그림이 되니 이것이 곧 민화의 한종류인 문자도라는 것이다. 한획 한획 그려내는 그림 솜씨도 일품이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을 묶어 세우고 흥이나게 하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이의 구수한 입담이다. “어디보자 김 아무개라고 했던가? 결혼은 했나? 그럼 부부금슬 좋으라 여기에는 기러기를 넣고 … ” 그림과 함께 구수한 덕담까지 들을수 있고 구경하는 사람들의 마음마저 훈훈하게 하니 그 또한 기발한 솜씨가 아닌가? 영화 서편제를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러한 풍경을 쉽게 기억해 낼수 있을것이다. 이제 이런 풍경은 영화의 한장면 속에서나 볼수 있는 귀한 풍경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거리를 떠도는 장똘뱅이신세로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그림쟁이들. 술한잔, 밥한끼니에 그림을 팔러 다녔던 이들이 곧 민화를 그린 사람들이다.
혹자는 민화를 피카소의 닭그림과 비교하면서 ‘피카소의 닭그림만이 세계명화인가? 피카소이전부터 그에 못지않은 현대성을 갖춘그림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의 민화중 하나인 봉황도다’라며 세계화를 부르짖고 ‘해학의 그림’이다, ‘신명의 그림’이다 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지만 그 무엇보다도 민화의 소중한 가치는 바로 억눌리고 짓밟히며 살았지만 절망하지 않았던 우리 민초들의 삶과 정서, 희망이 풋풋이 배어있는 민중의 그림이라는 사실이다.
조선시대 민중이 어디 사람취급이나 제대로 받았던가? 민은 곧 나라의 근본이다하여 ‘민은 곧 천’이요, ‘민심은 천심’이라며 민본(民本)을 주장하였지만 애당초 하챦고 어리석은 것들이라하여 ‘소민(小民)’ ‘우민(愚民)’이라고도 하였으니 어디 변변한 문화하나 제대로 향유할수 있었겠는가 … 하지만 이는 지배자적 관점이요 편견일 뿐이며 역사는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민화는 원래 궁가나 양반집에서 새해를 송축하고 복을 기원하는 길상의 의미로 서로에게 그림을 선물하던 것으로 ‘세화(歲畵)’라는 것이 조선후기 민중들의 의식과 힘이 성장하면서 여염집에서도 이를 본뜨며 향유하게 된것이다. 애초에 민중들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도 그들처럼 문화를 가질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했는지도 모른다. 민화가 유행하던 18~19세기는 민중들의 의식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확대되는 시기였다. 이시기는 농,공,상업등의 경제분야에서 서서히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태동, 발전해가면서 그 사회를 지탱해왔던 봉건적 질서가 크게 위협받는 시기였던 것이다. 상,공업의 발달과 신분제의 변동은 봉건적 질서의 위기를 초래하였고 그 가운데 민중들은 역사의 주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되었다. 세금을 거부하는 소극적인 저항에서 적극적인 민란에 이르기까지 민중들의 저항은 더이상의 굴종을 거부하는 힘으로 표출되었다. 홍경래의 난이 그렇고 동학운동이 그러하다.
문화적으로도 한글소설, 시조, 판소리, 탈춤등 지배층과 대립되는 민중문화가 성장하였으니 그림이라고 예외였을까? 민화에는 역동하는 민중들의 소박한 생활감정과 희망이 상징적으로 담겨져있다. 그러나 민화에는 생동하는 민중들의 구체적인 삶과 현실이 형상화된 사실주의정신이 결여 되어있다. 아니 일제 36년을 통해 그 가능성의 싹을 모조리 거세당한 때문이다. 우리의 말과 글 심지어는 이름까지 빼앗아 갔으니 무엇하나 제대로 남았겠는가? 하물며 민화라는 이름조차도 1959년 일본인 민예학자인 ‘야나기 무네요시(유종설)’라는 사람이 처음 사용한 말이니 말이다.
‘까치와 호랑이’라는 민화가 있다. 이를 보고 해석하는 많은 시각이 있지만 우습게 생긴 호랑이의 모습을 마치 몰락해가는 양반의 모습으로 나뭇가지위에 앉아 호랑이를 희롱하는 듯한 두마리 까치의 모습을 마치 성장하는 민중의 영민함으로 보는 해석을 나는 제일 좋아한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이 하나였던 민중그림 민화! 돈있고 세력있는 권세가의 거실이나 장식하는 혹은 전시장에서 돈많은 졸부들을 기다리는 그런 그림이 아닌 구멍뚫린 창호지 문짝에 바람막이그림으로, 첫날밤 신혼부부의 부끄러움 가려주고 아들 딸 많이 낳고 행복하라는 병풍그림으로, 때로는 벽을 도배하는 도배지 대신의 그림으로, 놀이그림, 예배그림, 생활그림(장식그림)으로 민중들의 삶과 소망을 함께해온 우리의 그림.
우리시대에게 이런 그림을 만날수 있고 이런 그림을 가질수 있다는 것은 행운만은 아니다.
'그림 독백'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할머니의 빨간약 (0) | 2012.06.30 |
---|---|
무제... (0) | 2012.06.01 |
귀부인 같은 사람보다도 농민의 딸이 훨씬 아름답다 - 빈센트 반 고흐 (0) | 2010.03.11 |
육척도 안되는 몸으로 4해(四海)를 초월하려는 뜻이 있네-공제윤두서 (0) | 2008.08.26 |
이중섭의 황소, 그리고 한미쇠고기협정 (0) | 2008.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