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이중섭의 황소, 그리고 한미쇠고기협정 본문

그림 독백

이중섭의 황소, 그리고 한미쇠고기협정

WIND69 2008. 5. 28. 13:41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미쇠고기협정으로 세상이 들썩하다. 광우병, 검역주권 등등
보수정권과 여당은 쇠고기괴담이니, 정치적 배경이 있느니 떠들어 대지만, 그들의 의견은 논리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못하다. 그저 급급한 변명과 오기에 다름아닐 뿐이다.

화가 이중섭!
일제의 엄혹한 시기에 자신의 창작열를 뜨겁게 불태운 사람...

191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출생하여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나왔으며, 일본의 도쿄 제국미술학교, 문화학원에 수학하며 본격적인 미술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부유한 농가의 유복자로 태어났으나 그의 말로는 불행했다. 그를 옥죄었던 생활고로 일본인 부인과 두자녀와의 헤어졌고 정신이상의 휴유증으로 고생하였으며, 1956년 결국 짧은 생을 마감한다.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롭기를 추구한다. 그 역시 자유로운 기질을 선천적으로 나고났으며 예민한 감수성과 아이같은 순진무구함, 외곬수적 성격 등 누가봐도 그는 천상 예술가였다.

그는 흰소, 황소, 투계, 닭과 가족, 아이들과 물고기와 게, 은지화 등 많은 작품을 후대에 남겼다. 이중섭은 몰라도 그의 그림을 보면 '아! 이그림'할 정도로 그의 그림은 대중적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이중섭의 그림에는 나라를 잃은 젊은이의 고뇌와 피난시절의 가족생활, 이별의 아픔과 그리움 등이 짙게 스며들어 있다.

본래 그림이라는 것은 작가와 감상자의 소통 수단이다. 그림 속에는 화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렇기에 화가의 진실한 삶이 없고, 감상자 역시 자신의 성찰적 삶이 없고서야 어찌 서로 교감할 수 있을것인가?

그림은 보는이의 처한 상황 속에서 새롭게 해석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교감 속에서 작가의 의도와 감상자의 해석에서 접점을 모색하는 시도를 하게되고 간극은 그 만큼 좁혀진다. 감상자의 인문학적 소양과 상상력은 그림과 화가, 그를 둘러싼 시대적 상황을 이해는데 촉진제가 된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지금의 상황과 감상자의 모든 경험을 동원해서 그냥 그림을 읽어보자! 해석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없고 설령 틀렸다고 해서 기죽을 것도 없다. 흔한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일 뿐이다.

이중섭의 표효하는 황소의 모습 속에서 비 상식적인 한미쇠고기협상의 실상을 본다. 불안한 붉은색, 거친 숨을 몰아쉬는 소의 저항,  강렬하고 거친 붓터치...지금의 불안한 소고기 정국의 모습이 읽혀지지 않는가? 광우병에 불안해 하는 국민들, 그리고 자신의 건강한 삶을 지켜려는 격렬한 저항... 정부와 보수주의자들은 이 그림을 보고 그저 불순한 세력의 체제전복을 위한 정치적 행보로만 느낄까?
아니면 미친소의 공허한 울부짖음으로 느낄까? 허긴 온통 붉은 색이 빨갱이들의 미쳐 날뜀으로 보이기도 할 것이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