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인문학! 가난한 이들을 위한 희망의 담금질 본문
IMF 이후 한국사회는 개벽하였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 참으로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무한경쟁 체제가 도입되었고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좌절해야만 했다. 중산층은 몰락하고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화되었다. 실업자가 속출하고, 많은 이들이 거리로 나앉았다. 그런데 인문학이라니? 더욱이 가난한 이들에게...
인문이란 말 그대로 ‘인간의 모습이 드러나 형상’ 이며 인문학이란 그 원리를 찾는 행위이다. 그런데 철학, 역사, 문화, 예술 등 인문학이라면 왠지 모를 거부감부터 생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을 공부하는 것 자체가 낭비이고 사치로 여겨진다. 당장 배고픈데 철한은 무슨 철학! 어느 틈에 인문학은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인문학은 ‘우리의 삶’(공적인 삶)과 소통되지 않고 분리된 상태로 상아탑에 머물며 여유로운 자들의 지적 유희수단으로 전락해 버린지 이미 오래이다. 상아탑이라 일컫는 대학에서마저도 인문학은 실종되고 있다. 무한 경쟁 사회의 격랑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미래를 꿈꿀 기회마저도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다움보다 자신의 상품적 가치를 키우는 일에 더욱 매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식의 실용성’ 만이 강조되는 현 세태 속에서 ‘졸업한 다음 써먹지도 못할 지식을 왜 가르쳐야 하는가 혹은 배워야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이미 우리의 뇌리에 익숙하게 침투하고 있다.
인문학에 대한 불편한 진실
최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속도와 경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상실되고 있는 인간의 근원에 대한 문제제기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아래의 글처럼 이제 인문학은 생존의 근원이 될지도 모르겠다.
‘같은 지식근로자라 하더라도 지식과 정보를 처리하는 일에 종사하는 근로자보다 지식과 정보를 창출하여 활용할 줄 아는 근로자가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식과 정보를 처리하는 기능은 아주 빠를 속도로 지능화되고 있는 첨단기기들에 의해 대처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세는 너 나아가 지식에서 지혜로, 분석에서 종합으로, 자연과학에서 인문학으로의 권력이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 메가트랜드 코리아 중에서
어찌되었건 다시 인간이라는 근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사실 인문학은 이미 우리의 삶과 밀접한 연계를 맺고 있다.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것,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인 것이다. 인문학은 성찰적 사유능력을 길러줌으로써 우리의 삶의 마당인 가정과 지역에서의 삶의 질을 높여주며, 미래직업의 핵심 능력이 되는 인문학적 상상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세계적 CEO들이 인문학에 주목하는 이유이며, 그러한 이유로 가난한 이들에게는 진정한 부의 원천인 것이다.
지난 2006년 한국사회에서 의미있는 세미나가 열렸다. 11년간 미국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인문학교육과정인 클레멘테 코스를 운영해온 작가이자 교육실천가인 얼 쇼리스를 초청한 것이다. 얼 쇼리스는 우리가 허투루이 보아 넘겼던 인문학의 가치를 의미심장하게 부활시켰다. 그는 클레멘테 코스 교육과정을 통해 알코올 중독자, 노숙인 마약중독자, 재소자들에게 철학과 역사학 등 인문학을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완전히 새로운 삶을 지향하게 만들었다.
클레멘터 코스를 처음 시작한 얼 쇼리스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훈련’이 아닌 ‘교육(인문학)’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계기와 이유를 여성재소자였던 비니스와의 대화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실 그전까지 우리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당시 그 교도소에서 재소자와 교화를 위한 상담을 할 때 대화주제는 대체로 여성학대에 관한 것이다. 재소자였던 비니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눈은 전체적으로 완전히 생기를 잃은, 말 그대로 ‘제소자의 눈’ 그 자체였으며, 그 안에서는 적대감마저 서려 있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경멸하듯이 나를 노려보면서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문제는 아이들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얼 박사님, 그 애들은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그러면 그 애들은 그런 곳에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은 결코 가난해지지 않을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인지...?”
“제 말은, 그 애들에게 자기가 사는 지역의 거리에 방치되어 떼를 지어 싸돌아다나면서 하는 식말고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살 수 있는지 자기들이 사는 지역에서 배우고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대안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비니스는 그때 일자리나 돈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비니스가 말하는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인 삶’이란 곧 인문학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가난한 이들의 희망인가? 얼 쇼리스는 시내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인 삶을 ‘반성적 사고’와 ‘정치적 삶’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근본적인 힘이라고 본 것이다. ‘정신적 삶’은 스스로 행동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며 , 스스로 행동하는 것은 ‘자율적인 인간’에게서 만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인문학은 ‘자율적 인간’이 되기 위한 ‘반성적 사고’와 ‘정치적 삶’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위험하다. ‘보이지 않는 손’과 ‘눈’ 그리고 강요된 타율 속에서 배회하는 우리들에게 반성적 사고와 정치적 삶을 이끌어 갈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위험을 주게 될 것인가? 어쩌면 이러한 ‘불편한 진실’이 우리의 삶에서 인문학을 내몬 것은 아닐까?
노숙인이 인문학을? - 인간의 존엄성을 드높이는 인문학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에서 시작한 인문학교육과정인 ‘성프란시스 대학’의 학생들이 졸업을 위해 2006년 말,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1년동안 철학, 역사, 문학, 예술 등 인문학 교육과정을 성실히 이수하였다. 모두들 ‘사치’와 ‘낭비’ 로만 생각했던 인문학교육이 그 첫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거리에서 찌든 생활을 청산하기란 정말로 어려운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져서 제대로 생각하고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것이 거리 생활의 결과입니다. 이와 같은 처리로 다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내 자신의 생각과 마음상태를 정비하는 기간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인문학 과정이 이런 정비기간이었습니다. 이 과정을 마쳤다는 것만으로도 난 이 세상으로 가까이 갈 수 있는 희망을 찾은 것입니다.’
1년의 인문학교육 과정을 통해 이들은 이미 반성적 사과와 정치적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갈 힘을 키워가고 있다. 차라리 세상이 던져주는 빵조각에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주체적인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편하고 쉬운 길 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차라리 이 교육과정을 듣지 말 것을...’ 이라며 자조 섞인 이야기를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더 어려운 길을 선택하였다.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문’이다.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혹 우리는 ‘사회적 통념의 가치’ -부와 명예-에 내몰리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체의식을 상실하고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그들(노숙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인문학의 수혈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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